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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카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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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리카 법전(Lex Salica)은 프랑크족의 첫 번째 왕인 클로비스 1세가 의뢰하여 507년과 511년 사이에 발표된 법전으로, 프랑크족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다. 이 법전은 형법과 민법을 포함하며, 상해, 재산 피해, 절도 등에 대한 배상과 벌금을 규정하고, 가족 구성원의 권리를 명확히 정의했다. 살리카 법전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와 카롤링거 왕조 시대를 거치며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특히 샤를마뉴 시대에는 다른 게르만 민족의 법률 조항을 통합하는 등 내용이 확장되었다. 이 법전은 유럽의 왕위 계승에도 영향을 미쳐, 프랑스, 독일,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에서 왕위 계승과 관련된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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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카 법전
살리카 법
문서 정보
문서 이름살리카 법
694년에서 711년까지 통치한 [[킬데베르트 3세]]의 판결 기록
킬데베르트 3세의 판결 기록
작성일기원후 약 500년경
제정자클로비스 1세
문서 유형법, 정의
목적민법 규정
개요
언어라틴어
특징라틴어와 9세기 프랑스어 중간 형태의 언어 사용
관련 민족살리 프랑크족
상세 내용
내용형사법, 민법, 절차법 등 다양한 법률 규정 포함
추가 정보
특징당시 게르만 사회의 풍습과 전통 반영

2. 역사

클로비스 1세가 군 지휘관들에 둘러싸여 살리카 법전을 작성하고 있다.


358년 율리안 황제가 프랑크족을 '데디티키이(dediticii)'로 만들었을 때, 그들이 정착했던 톡산드리아(Toxandria)의 프랑크족 정착지.


살리카 법전(Lex Salicalat)은 모든 프랑크족의 첫 번째 왕으로 여겨지는 클로비스 1세(약 466~511년)의 지시로 507년에서 511년 사이에 처음 편찬되었다.[5] 이전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관습법성문법으로 만들어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목적이었다.[6][7] 이 법전은 살리족의 고대 게르만 관습법을 기반으로 하면서, 부르군트족 등 다른 게르만 부족 법전의 요소와 새롭게 성립된 프랑크 왕권에 관한 규정을 통합한 것으로 보인다.

클로비스 1세 이후 약 300년 동안 살리카 법전은 손으로 베껴 쓰는 과정에서 계속 수정되고 보완되었다. 새로운 법이 추가되거나 기존 법이 개정, 삭제되면서 여러 판본이 생겨났으며, 필사 과정에서 오류나 개별적인 수정이 더해지기도 했다. 현존하는 수십 종의 사본들은 내용과 형식 면에서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며, 학자들은 이를 몇 개의 계열로 분류하여 연구한다.[8]

살리카 법전은 특히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중요한 개정을 거쳤다. 피핀 3세 통치 시기에 이미 한 차례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으며[12], 그의 아들 샤를마뉴 시대에는 더욱 광범위한 개혁이 진행되었다. 샤를마뉴는 당시 서유럽 대부분을 아우르던 신성 로마 제국의 다양한 게르만 부족들의 법률을 살리카 법전에 통합했다.[12] 예를 들어, 리푸아리아 프랑크족의 법(Lex Ripuarialat)이나 알라마니족의 법(Lex Alamannorumlat) 등이 살리카 법전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이는 제국 내 다양한 부족들을 프랑크 법 체계 아래 통합하려는 시도였으며, 이렇게 개정된 법전은 Lex Salica Emendatalat 등으로 불렸다.[12]

이처럼 살리카 법전은 메로빙거 왕조부터 카롤링거 왕조 시대까지 프랑크족 사회의 근간이 되는 법률로 기능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각 지역의 왕권이 약화되면서 점차 법전의 실제적인 효력은 약해졌지만, 그 원칙과 내용은 후대의 유럽 법률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2. 1. 메로빙거 왕조 시대



살리카 법전(Lex Salica)의 원본은 모든 프랑크족의 첫 번째 왕인 클로비스 1세(약 466~511년)가 의뢰하여 507년과 511년 사이에 발표되었다.[5] 그는 이전까지 특정 원로들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구전으로 전승되던 관습법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기록하기 위해 네 명의 위원을 임명했다.[6] 당시 관습법은 필요할 때마다 원로들이 모여 논의하는 방식이었으나, 클로비스 1세는 성문법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통치하고자 했다.[7] 따라서 살리카 법전은 고대의 관습과 관행을 반영하고 있다.[7]

살리카 법전은 메로빙거 왕조 시대 이후 약 300년 동안 손으로 베껴지면서 내용이 수정되고 추가되었다. 이 과정에서 필사자 개인의 영향으로 다양한 사본이 만들어졌으며, 각 사본은 고유한 특징을 지닌다. 법 조항들은 각각 '제목(title)'이라 불렸으며, 종종 "de"(~에 관한)라는 라틴어 접두사가 붙었다.

현존하는 사본들은 여러 계열로 나뉘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계열 I 사본들은 8세기와 9세기에 작성되었지만, 6세기 클로비스 1세 시대에 편찬된 원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9] 이 사본들에는 라틴어 단어에 대한 당시 프랑크족의 궁정 언어(malbergo) 주석인 '말베르크 주석(Malbergse Glossen)'이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10] 계열 II 사본들은 계열 I과 기본적인 내용은 같지만, 후대에 추가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11]

살리카 법전은 살리족의 게르만 관습법을 기반으로, 부르군트족 법전과 같은 다른 게르만족 부족 법전의 요소와 새롭게 성립된 프랑크 왕국의 왕권에 관한 규정을 통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개정을 거듭하며 카롤루스 대제 시대까지도 적용되었으나,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각 지역 왕권이 약화되면서 점차 법적 효력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2. 2. 카롤링거 왕조 시대

살리카 법전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도 중요하게 사용되며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8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작성된 패밀리 III 계열 사본들은 피핀 3세 시대의 개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 법전은 99개 또는 100개의 항목으로 확장되었으며, 일부 사본에서는 말베르 주석(Malberg Glosses)이 유지되었으나 다른 사본에서는 주석이 삭제되고 언어를 간결하게 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12] 한 사본은 "프랑크의 우리 가장 영광스러운 왕 피핀의 통치 13년차에" 작성되었음을 명시하고 있어[12], 이 개정판은 피핀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간주되어 Pipina Recensiolat라고 불린다.

샤를마뉴 시대에는 더욱 중요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패밀리 IV 계열 사본들은 샤를마뉴 통치 말기인 798년경에 이루어진 법전 개혁의 결과물로 추정된다.[12] 이 판본은 스스로를 Lex Salica Emendatalat, Lex Reformatalat, 또는 Lex Emendatalat라고 칭하며, 샤를마뉴의 법률 정비 노력의 결과이다.

당시 서유럽 대부분을 아우르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마뉴는 프랑크족뿐만 아니라 제국 내 다른 게르만 민족들의 법률도 살리카 법전에 통합했다. 이는 기존 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아니었던 게르만 부족들의 관습법을 선택적으로 추가한 것으로, 통합된 법전 전체는 여전히 Lex Salicalat라는 명칭을 유지했다. 통합된 주요 법률로는 리푸아리아 프랑크족의 법인 Lex Ripuarialat (또는 Lex Ribuariorumlat)와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던 알라마니족의 법인 Lex Alamannorumlat 등이 있다.[12] 프랑크족의 지배 하에 있던 이들 민족에게 자신들의 고유 법률 일부를 살리카 법의 틀 안에서 인정해 준 것은 일종의 유화책으로 기능했을 수 있다. 샤를마뉴는 더 나아가 알라마니족 이전 수에비족의 고대 법전인 Lex Suauorumlat의 내용까지 참조하여 법전을 개정했다.

이처럼 샤를마뉴 시대에 개정 및 확장된 살리카 법전은 프랑크 왕국 전역의 프랑크족에게 적용되는 통일 법전으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분열, 멸망하고 각 지역 왕권이 약화되면서 살리카 법전은 점차 실제적인 효력을 잃어갔지만, 그 법률적 원칙과 영향력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2. 3. 후대의 영향

살리카 법전은 여러 차례 개정을 거치며 카롤루스 대제 시대까지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후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멸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프랑크 왕국의 영토에 새로 들어선 여러 나라들은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살리카 법전은 점차 그 효력을 잃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리카 법전이 남긴 영향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3. 주요 내용

살리카 법전은 크게 형법과 민법 조항으로 구성되어 당시 프랑크 사회의 법률 체계를 보여준다. 형법 조항은 주로 개인 간의 다툼이나 범죄에 대한 손해배상 및 벌금 규정을 다루었으며, 민법 조항은 가족 관계와 재산 상속, 특히 남계 상속 원칙을 중심으로 규정하였다.

3. 1. 형법

살리카 법전의 형법 조항들은 당시 프랑크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이 법은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재산에 피해를 주는 행위, 절도, 그리고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인 처벌 규정을 두었다. 처벌은 주로 피해 보상을 위한 손해배상금이나 벌금 부과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징수된 벌금의 3분의 1은 법원 운영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법 조항의 해석과 적용은 배심원단이 담당했다.

3. 2. 민법

민법 조항에 따르면, 개인이 가족 공동체에 속하지 않을 경우 법적인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가족 구성원의 권리는 명확히 규정되었는데, 예를 들어 장자상속제와 달리 모든 생존 남성 상속인에게 토지를 동등하게 분할하는 원칙이 있었다.

민법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남계 상속으로, 여성이 왕위나 봉토를 상속받는 것을 명시적으로 배제했다. 이 때문에 '살리카 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남계 상속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기도 했지만, 살리카 법의 중요성은 단순히 상속 규칙을 넘어 현대 유럽 대륙 여러 법 체계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살리카 법은 성별을 기준으로 계승 순위를 정했다. '남계 상속'은 왕위나 봉토가 전임자의 남성 쪽 친족, 즉 형제, 아들, 또는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먼 사촌과 같은 방계 남성 친족 포함)에게만 이전됨을 의미한다. 주요 형태로는 남계 장자상속(남성 혈족 중 최연장자에게 상속)과 남계 장남상속(장남에게 상속)이 있으며, 후자가 더 일반적이었다. 군주에게 아들이 없으면, 남계 혈족 중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이 왕위를 계승했다.

토지 상속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었다.

: 하지만 살리카 토지의 상속 재산 중 어떤 부분도 여성에게 돌아가지 않고, 토지의 전체 상속 재산은 남성에게 돌아간다.[19]

다른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기도 한다.

: 살리카 토지에 관하여, 여성에게는 어떤 부분이나 상속도 없으며, 모든 토지는 형제인 남성에게 속한다.

이 법은 여성이 선대의 '살리카 토지'를 상속하는 것만 금지했을 뿐, 동산과 같은 다른 재산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약 570년경 히르페릭 1세 치세에는 남성 상속인이 없을 경우 딸이 토지를 상속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기도 했는데, 이는 후대의 반살리카 계승이나 남성 우선 장자상속 원칙의 근거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법의 문구와 당시 및 후대의 관행을 고려할 때, 상속은 주로 형제간 분할이 원칙이었으며, 계승 순서를 정할 때도 직계 장자상속보다는 남계 혈족 중 연장자를 우선하는 계열 장자상속(agnatic seniority)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있다.

15세기 이후 유럽 대륙의 세습 군주제에서 살리카 법은 모든 여성의 계승을 배제하고, 여성을 통한 계승권 이전조차 금지하는 엄격한 원칙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원칙을 따르는 대표적인 시스템으로는 계열 장자상속과 계열 상속(agnatic succession)이 있다.

소위 '''반살리카(Semi-Salic)''' 계승 방식은 우선 모든 남성 후손과 방계 남성 혈족에게 계승권이 주어지지만, 이들이 모두 단절될 경우 마지막 남성 소유자의 가장 가까운 여성 친족(딸 등)이 상속받고, 그 후에는 다시 살리카 법 원칙에 따라 그녀의 남성 상속인에게 계승권이 넘어가는 방식이다. 즉, 마지막 군주와 가장 가까운 여성이 상속을 위해 일시적으로 '남성'으로 간주되는 셈이다. 이 방식은 왕조 내에서 비교적 하위 계열의 후손이라도 현존하는 가장 가까운 혈족이라는 이유로 상속받을 수 있게 하며, 기존의 상위 계열이었던 여성 계열은 가장 가까운 여성 계열의 뒤를 잇게 된다.

중세 이후에는 '''인척 남성 장자상속(cognatic male primogeniture)'''이라는 또 다른 계승 시스템도 등장했다. 이는 여성 자신은 계승에서 배제되지만, 여성의 아들을 통해 계승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토지가 여성에게 돌아가지 않고 남성에게 돌아간다"는 살리카 법의 원래 규정을 충족시킨다. 예를 들어, 아들이 없는 할아버지는 딸이 살아있더라도 딸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있으며, 자녀가 없는 삼촌은 누이가 살아있더라도 누이의 아들에게 계승될 수 있다. 이는 "준살리카(quasi-Salic)" 계승 시스템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장자상속 원칙을 따르면서도 인척(여성 혈족)을 통해 남성 우선으로 계승이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4. 말베르크 주석

살리카 법전에는 "말베르크 주석"(독일어 Malbergische Glossen 또는 malbergische Glossen)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름과 달리 사전적 의미의 주석은 아니다.[13][14] 이 주석에는 몇몇 변형된[15] 고대 프랑크어[13][15][16] 또는 일부 네덜란드 학자들의 견해로는 고대 네덜란드어 단어들과 해당 언어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완전한 문장으로 추정되는 문장이 포함되어 있다.[17]

말베르크 주석malthothi*afriolito**
(현대) 네덜란드어ik meld,joubevrijd ik,laat
영어I tell you:I am setting you free,serve


  • '''thi''': 고대 네덜란드어와 초기 현대 영어 및 그 이전 버전에서는 "thou"와 "thee"와 같은 2인칭 단수 대명사를 사용했다.
  • * '''lito''': 농노제의 일종인, 영주 땅에 묶여 있지만 영주 소유는 아닌 반자유 농민이었다. 반면 노예는 영주가 완전히 소유했다.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제시되기도 한다.[18]

말베르크 주석maltho:thiafrio,letu!
번역나는 재판상 선언한다:나는 너를 자유롭게 한다,반자유민!


5. 유럽 왕위 계승에의 적용

살리카 법은 본래 살리 프랑크족의 관습법으로 여성의 특정 토지(테라 살리카, terra salica) 상속을 금지하는 조항이었으나[24], 후대에 확대 해석되어 여러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이 법은 상속 문제 전반을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동산 상속 등은 포함하지 않았다. 중세 프랑크족 사회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남성에게 주어진 정착지를 남성에게만 상속시키려던 규정이 그 기원으로 추정된다.

프랑스 왕국에서는 카페 왕조가 단절된 후 발루아 왕조가 들어서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을 배제하는 근거로 살리카 법이 본격적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잉글랜드와의 백년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 이후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조에 이르기까지 살리카 법에 기반한 남성 우선 계승 원칙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24]

프랑스에서 확립된 이 원칙은 다른 유럽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 제2제국에서도 여성의 계승을 배제하는 원칙은 유지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영향 아래 있던 베스트팔렌 왕국, 네덜란드 왕국, 그리고 스웨덴(베르나도트 왕가) 등에서도 살리카 법이 채택되었다.

유럽 역사의 여러 군사적 갈등은 살리카 법의 적용 또는 해석과 관련이 깊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1713년 국사조칙을 통해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보장하려 하면서 촉발되었는데, 이는 기존의 상속 원칙(카를 6세 본인도 살리카 법에 따라 조카들보다 우선하여 영토를 상속받았다)을 변경하려는 시도였다. 스페인에서는 부르봉 왕조 출신 펠리페 5세가 살리카 법을 도입했으나, 이후 페르난도 7세가 딸 이사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이를 폐지하려 하자 보수파의 반발로 카를리스트 전쟁이 발발했다.

독일 지역 국가들에서도 살리카 법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었으며, 이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와 같은 정치적 분쟁뿐만 아니라 작센-바이마르 등 여러 공국의 상속 및 결혼 협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노버 왕국의 경우, 1837년 영국의 빅토리아가 즉위하자 살리카 법을 따르던 하노버는 여성 군주를 인정하지 않아 동군연합이 해소되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왕위에 올랐다. 룩셈부르크 대공국 역시 1890년 네덜란드에서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하자 동군연합을 해소하고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를 대공으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 룩셈부르크는 남계 후손이 단절되자 계승법을 개정하여 여성의 계승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에서도 사보이아 왕가 하에서 왕위 계승은 살리카 법에 따라 규정되었다. 이처럼 살리카 법 또는 그와 유사한 부계 계승 원칙은 유럽 여러 왕가의 계승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때로는 국제적인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5. 1.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 시대 프랑크 왕들은 살아있는 모든 아들들에게 영토를 동등하게 분할 상속하여, 상속자들 사이에 잦은 갈등과 형제 살해가 벌어졌다. 이후 카페 왕조 시대에 이르러 장남이 우선적으로 상속받는 장자 상속제가 점차 확립되었다. 초기 카페 왕조의 왕들은 장남을 후계자로 삼아 생전에 대관식을 통해 공동 왕으로 삼았고, 차남들에게는 왕의 종주권 아래 있는 봉토인 아파나주를 주었다. 초기에는 봉건법에 따라 아들이 없는 경우 딸도 아파나주를 상속받을 수 있었으나, 프랑스 왕위 자체에 이 법이 적용되는지는 1316년까지 명확한 선례가 없었다.

987년 카페 왕조가 시작된 이래 1316년 프랑스의 루이 10세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 왕위는 항상 선왕의 장남이 계승해왔기에, 여성이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는지에 대한 문제는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다. 루이 10세가 아들 없이 사망했을 때 왕비는 임신 중이었고, 국왕의 동생인 푸아티에 백작 필리프가 섭정을 맡았다. 필리프는 루이 10세의 딸이자 잠정적 상속녀인 잔의 외삼촌인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와 협의하여, 태아가 남자면 왕위를 계승하고 여자면 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섭정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두 딸 모두에게 왕위 계승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시사했다.

다행히 태어난 아이는 프랑스의 장 1세라는 아들이었으나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필리프는 오도 4세와의 약속을 깨고 1317년 1월 랭스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5세로 즉위했다. 루이 9세의 딸이자 잔의 외할머니인 부르고뉴 여공 아녜스는 이를 찬탈로 여기고 귀족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1317년 2월, 고위 성직자, 귀족, 파리 시민, 대학교 교수들이 모인 프랑스 삼부회가 열렸다. 필리프 5세의 요청에 따라 삼부회는 "여성은 프랑스 왕국을 계승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선언하며 그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했다. 이로써 여성이 프랑스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원칙이 공식화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살리카 법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고, 필리프 5세는 루이 10세와의 혈연적 근접성을 내세워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필리프 5세는 자신의 딸 잔을 부르고뉴 공작 오도 4세와 결혼시키고 아르투아 백작령과 부르고뉴 백작령을 상속 재산으로 주어 그를 달랬으며, 1317년 3월 27일 라온에서 체결된 조약을 통해 잔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필리프 5세 역시 아들 없이 사망하자 동생 샤를 4세가 별다른 반대 없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샤를 4세도 아들 없이 사망하고 왕비가 임신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자 1316년과 유사한 계승 위기가 다시 발생했다. 이때는 이미 여성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는 원칙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따라서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의 딸들과 샤를 4세의 여동생이자 잉글랜드에드워드 2세의 왕비인 이자벨라 프랑스는 계승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샤를 4세의 왕비가 딸을 낳자, 이자벨라는 자신의 아들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를 내세워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들은 "여성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권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이는 1317년에 확립된 원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결국 샤를 4세의 사촌인 발루아 백작 필리프가 섭정을 거쳐 1328년 필리프 6세로 즉위하며 발루아 왕조를 열었다.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가 1337년 가스코뉴를 몰수하려 하자 다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백년 전쟁의 불씨를 당겼다.

살리카 법(Salic law)이라는 명칭은 1316년이나 1328년 계승 논의에서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 법은 본래 살리 프랑크족의 관습법으로, 봉건 시대에 잊혔다가 프랑스 왕위가 오직 남성을 통해서만 계승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시 주목받았다. 살리카 법의 제59장은 여성의 특정 토지(테라 살리카, terra salica) 상속을 금지했는데, 이는 병역 의무를 지는 남성에게 주어진 정착지를 남성 상속자에게만 물려주려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후대에 확대 해석되어 프랑스 왕위 계승에 적용된 것이다. 1358년 수도사 리샤르 레스코(Richard Lescot)가 나바라의 샤를 2세의 왕위 계승 주장을 반박하며 처음으로 살리카 법을 언급했고, 이후 발루아 왕조를 지지하는 법학자들이 이 논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20]

발루아 왕조 이전 카페 왕조 시대의 아파나주는 남녀 모두에게 상속될 수 있었으나, 발루아 왕조 시대에 들어서는 왕위 계승법을 모방하여 남성에게만 상속되도록 제한되었다. 브르타뉴 공국 계승 문제에서도 브르타뉴의 몽포르 가문은 살리카 법과 유사한 남성 계승 원칙을 주장하며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았고, 전통적인 여성 계승을 지지하는 경쟁자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결국 몽포르 가문이 전쟁을 통해 공국을 얻었지만 프랑스 왕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희곡에서 프랑스의 샤를 6세가 살리카 법을 근거로 잉글랜드의 헨리 5세의 왕위 주장을 거부하여 아쟁쿠르 전투가 발발했다고 묘사했다. 실제로 살리카 법과 잉글랜드의 상속법 간의 충돌은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양국 군주 간의 프랑스 왕위를 둘러싼 주장의 핵심적인 정당화 논리 중 하나였다.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우세해지자, 헨리 6세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왕을 겸임한다고 선언했지만, 결국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를 통해 살리카 법에 기반한 왕위 계승이 이루어졌다.[24]

약 1세기 후, 프랑스 종교 전쟁 중에는 스페인필립 2세가 자신의 딸 이사벨라 클라라 에우헤니아(발루아의 엘리자베트 소생)를 프랑스 왕위에 앉혀 위그노인 나바라의 앙리의 즉위를 막으려 시도했다. 필립 2세의 대리인들은 살리카 법이 "순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주장하도록 지시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백년 전쟁을 거치며 프랑스에서 부계 계승 원칙은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결국 위그노였던 나바라의 앙리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앙리 4세로 즉위하면서 부르봉 왕조가 시작되었고, 살리카 법에 기반한 남성 중심의 왕위 계승 원칙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후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제1제국프랑스 제2제국에서도 황제 칙령을 통해 여성의 왕위 계승을 배제하는 원칙은 계속 유지되었다. 또한 나폴레옹의 영향 아래 있던 베스트팔렌 왕국, 네덜란드 왕국, 스웨덴(베르나도트 왕가) 등에서도 살리카 법이 채택되기도 했다.

5. 2. 독일

조지 데이브(George Dawe)가 그린 ''컴벌랜드 공작의 초상화''. 1837년 컴벌랜드는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보다 먼저 하노버의 국왕이 되었다.


독일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살리카 법이 채택되었다. 살리카 법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와 같은 정치적 사안뿐만 아니라, 독일 여러 국가의 상속과 결혼 결정에도 일상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작센-바이마르와 같은 공국에서도 살리카 법이 적용되었다. 유럽 귀족들은 결혼 협상 시 살리카 법을 고려해야 했는데, 토지 소유권이 여성의 남편에게 넘어가려면 남성 직계 후손이 완전히 끊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여성 통치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여러 국가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하노버 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들 수 있다. 하노버 선제후(후에 국왕)는 1714년부터 영국 국왕을 겸임하며 하노버 왕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1837년 영국의 윌리엄 4세가 사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4세의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살리카 법을 따르는 하노버에서는 여성의 계승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하노버 왕위는 윌리엄 4세의 남동생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삼촌인 어니스트 아우구스트에게 돌아갔고,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

5. 3. 룩셈부르크

오랫동안 독일의 영향 아래 있던 룩셈부르크1815년 대공국으로 성립된 이후, 오라녜-나사우 가문의 네덜란드 국왕이 대공을 겸임하는 동군 연합 상태였다.

그러나 1890년 네덜란드에서 빌헬미나 여왕이 즉위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당시 룩셈부르크는 여성의 대공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살리카 법 원칙을 따르고 있었기에, 빌헬미나 여왕은 룩셈부르크 대공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룩셈부르크의 동군 연합은 해소되었다.

룩셈부르크는 빌헬미나 여왕의 먼 친척인 나사우-바일부르크 가문의 아돌프를 새로운 대공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아돌프의 뒤를 이은 기욤 4세에게 아들이 없어 남계 후계자가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룩셈부르크는 계승법을 개정하여 여성의 대공위 계승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개정 덕분에 기욤 4세의 딸들인 마리 아델라이드와 샤를로트가 차례로 여대공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5. 4. 스페인

스페인에서는 원래 여성의 왕위 계승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 출신인 필리페 5세는 1713년 왕위 계승법을 제정하여 살리카 법을 도입했다. 다만, 남계 후손이 없을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여성의 상속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증손자인 페르난도 7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딸 이사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1830년에 살리카 법 폐지를 선언했다. 이에 페르난도 7세에게 불만을 가진 보수파 세력은 이 선언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인 돈 카를로스를 왕위 계승자로 내세웠고, 1833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카를리스트 전쟁을 일으켰다.

20세기에도 '카를리스트' 운동은 이어졌으나, 1936년 돈 카를로스의 직계 남자 후손이 끊기면서 상황이 변했다. 1713년 왕위 계승법에 따르더라도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25]의 남자 후손이 왕위 계승자가 되므로, 이를 받아들일지를 두고 카를리스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세력이 약해졌다. 현재 스페인 헌법에 따라 알폰소 12세의 증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자손이 남자 우선 장자 상속 제도 원칙에 따라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Lex Salica: The Ten Texts with the Glosses, and the Lex Emendata https://archive.org/[...] John Murray, Albemarle-Street / Trübner & Co., Ludgate Hill
[2] 웹사이트 Lees: Hoe het Nederlands is ontstaan http://www.kennislin[...] 2016-05-25
[3] 논문
[4] 서적 The Merovingian Kingdoms 450 - 751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4-06-23
[5] 논문
[6] 서적 History of languages: an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논문
[11] 논문
[12] 논문
[13] 서적 Hafliði Másson und die Einflüsse des römischen Rechts in der Grágás Walter de Gruyter
[14] 서적 Die volkssprachigen Wörter der Leges barbaorumals Ausdruck sprachlicher Interferenz Walter de Gruyter
[15] 서적 Chronologisches Wörterbuch des deutschen Wortschatzes: Der Wortschatz des 8. Jahrhunderts (und früherer Quellen) (Titelabkürzung: ChWdW8) Walter de Gruyter
[16] 서적 Die Personennamen auf den merowingischen Monetarmünzen als Spiegel der romanisch-germanischen Sprachsynthese im Frankenreich
[17] 서적 Dutch: Biography of a Language Oxford University Press
[18] 서적 Die Malbergischen Glossen, eine frühe Überlieferung germanischer Rechtsspache
[19] 서적 A Source Book for Medieval Economic History Biblo and Tannen
[20] 서적 Chronique de Richard Lescot, religieux de Saint-Denis (1328-1344). https://books.google[...] Librairie Renouard 1896
[21] 서적 Royal Flash Grafton paperback
[22] 백과사전 サリカ法典 https://kotobank.jp/[...] 弘文堂, 小学館日本大百科事典(ニッポニカ)
[23] 논문 『サリカ法典』の実効性に関する覚え書き https://www.gcoe.lit[...] 名古屋大学
[24] 웹페이지
[25] 웹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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